A Brief History of the Internet
A Brief History of the Internet
📍 이 이야기의 배경
1997년, 인터넷을 직접 만든 사람들이 모여 한 편의 문서를 작성했다. J.C.R. Licklider, Vint Cerf, Bob Kahn, Leonard Kleinrock 등 9명의 저자 명단은 그 자체로 인터넷 역사의 증인 목록이다. 이들은 1962년부터 1997년까지 35년간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면서 “정부, 산업계, 학계가 어떻게 파트너가 되어 이 기술을 발전시켰는지”를 강조했다. 이 문서가 작성된 1997년은 NSFNET 백본이 해체된 지 2년 후, 월드와이드웹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였다. 인터넷이 더 이상 연구자들만의 도구가 아니라 전 세계 인프라가 된 순간, 이들은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기록해야 한다고 느꼈다.
👥 등장인물들
J.C.R. Licklider - 1962년 8월, MIT에서 “은하 네트워크(Galactic Network)” 개념을 담은 메모를 작성했다. 전 세계가 연결된 컴퓨터 시스템을 통해 누구나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다는 비전. DARPA 책임자로 임명된 그는 Ivan Sutherland, Bob Taylor, Lawrence G. Roberts에게 이 비전을 전달했다.
Leonard Kleinrock - 1961년 7월, 패킷 교환 이론을 발표했다. 당시 지배적이던 회선 교환 전화 시스템에 도전하는 이론이었다. 1964년 책으로 출간된 그의 연구는 Roberts에게 패킷 교환이 실용적임을 증명했다.
Larry Roberts - 1965년 Thomas Merrill과 함께 매사추세츠의 TX-2 컴퓨터와 캘리포니아의 Q-32를 연결했다. “역사상 최초의 (비록 작지만) 광역 컴퓨터 네트워크.” 1966년 DARPA에 합류한 그는 1967년 ARPANET 계획을 발표했다.
Bob Kahn - BBN(Bolt Beranek and Newman)에서 IMP(Interface Message Processor) 아키텍처 설계에 핵심 역할을 했다. 1972년 DARPA로 이동한 직후, 그는 “개방형 아키텍처 네트워킹(open-architecture networking)”이라는 혁명적 개념을 제시했다. 서로 다른 네트워크들이 독립적으로 설계되어도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
Vint Cerf - 1973년 봄, Kahn이 스탠포드에서 영입했다. 두 사람의 협업으로 TCP/IP 프로토콜이 탄생했다. 1973년 9월 Sussex University에서 INWG#39로 배포된 초안, 1974년 정제된 버전 발표. 1985년부터 인터넷 커뮤니티 조직화를 주도했고, 1991년 Internet Society 설립을 이끌었다.
Steve Crocker - 1969년, Request for Comments(RFC) 시리즈를 시작했다. 네트워크 연구자들이 비공식적으로 빠르게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채널. 처음엔 우편으로 배포되던 종이 문서였지만, FTP와 웹을 거치며 인터넷 엔지니어링 커뮤니티의 “공식 기록 문서”로 진화했다.
Jon Postel - RFC 편집자이자 프로토콜 번호 관리자로 1998년 10월 사망할 때까지 봉사했다. 그의 역할은 단순한 행정가가 아니라 인터넷 프로토콜 체계 전체의 보존자였다.
David Clark - MIT 연구 그룹을 이끌며 TCP가 개인용 컴퓨터에 너무 복잡하다는 우려를 해결했다. Xerox Alto와 IBM PC를 위한 컴팩트한 구현을 만들었고, 완전한 상호운용성을 유지하면서도 개인 컴퓨팅에 최적화했다. 1980년대 Internet Configuration Control Board(ICCB) 의장을 지냈다.
Dennis Jennings - 1985년 NSF에 도착하여 NSFNET에 TCP/IP를 의무화하는 결정적 선택을 이끌었다. Steve Wolff는 1986년 NSFNET 책임자가 되어 연방 자금 지원과 무관하게 일반 학술 연구를 지원해야 한다는 인프라 필요성을 인식했다.
Dan Lynch - 1985년, IAB와 협력하여 3일간의 벤더 워크숍을 조직했다. 약 250명의 벤더 인력이 50명의 DARPA 연구 커뮤니티 발명가들의 발표를 들었다. “벤더들은 발명가들이 그렇게 개방적인 것에 놀랐고, 발명가들은 현장에서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발견했다.” 1988년 첫 Interop 무역 박람회를 조직하여 상용화의 물꼬를 텄다.
🔄 핵심 전환점들
1969년 9월 - 첫 번째 IMP 설치: BBN이 UCLA의 Network Measurement Center(Kleinrock 주도)에 첫 IMP를 설치했다. ARPANET의 첫 노드. 12월까지 4개의 호스트 컴퓨터가 연결되었다.
1970년 12월 - NCP 완성: S. Crocker의 Network Working Group이 Host-to-Host 프로토콜인 NCP를 완성했다. 1971-1972년 구현 후, 개발자들이 비로소 애플리케이션을 만들 수 있었다.
1972년 10월 - 공개 데모: Kahn이 조직한 International Computer Communication Conference에서 ARPANET 공개 시연. 같은 해 Ray Tomlinson(BBN)이 이메일 메시지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1973년 봄 - TCP/IP 개발 시작: Kahn이 Cerf를 영입하여 협업 시작. NCP의 한계—멀티네트워크 환경에 부적합—를 인식한 Kahn은 네 가지 원칙을 수립했다. (1) 각 네트워크는 독립적으로 작동, 내부 수정 불필요. (2) 통신은 최선노력(best-effort) 기반, 손실된 패킷은 소스에서 재전송. (3) 게이트웨이는 패킷 흐름 정보를 유지하지 않음, 단순성 보장. (4) 전역 운영 레벨 제어 없음.
1983년 1월 1일 - Flag Day: 모든 ARPANET 호스트가 NCP에서 TCP/IP로 동시 전환. “놀라울 정도로 순조롭게” 성공한 조정된 전환이었다. 같은 해, ARPANET이 MILNET(운영 요구사항 지원)과 연구용 ARPANET으로 분할되었다.
1985년 - 벤더 워크숍: Dan Lynch의 3일 워크숍 이후 2년간 회의, 튜토리얼, 설계 미팅이 이어졌다. 1988년 9월 첫 Interop 박람회에서 50개 회사가 기능하는 TCP/IP 제품을 선보였고, 5,000명의 고객 조직 엔지니어들이 “상호운용이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1995년 4월 - NSFNET 백본 자금 지원 중단: NSF가 지역 네트워크들에게 민간 부문 연결을 구매하도록 자금을 재분배했다. 8.5년간 존재했던 백본은 6개 56 kbps 노드에서 21개 노드, 다중 45 Mbps 링크, 7대륙 50,000개 이상의 네트워크를 지원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1990년 ARPANET이 해체되었을 때, “TCP/IP는 전 세계 대부분의 다른 광역 컴퓨터 네트워크 프로토콜을 대체하거나 주변화했다.”
🔧 해결해야 했던 문제
회선 교환의 한계: 1965년 Roberts와 Merrill의 실험은 시분할 컴퓨터들이 효과적으로 협업할 수 있음을 보여줬지만, 회선 교환 전화 시스템이 부적합하다는 것도 확인했다. Kleinrock의 패킷 교환 이론은 이론적 대안이었지만, 실제로 작동할지는 미지수였다.
멀티네트워크 환경의 프로토콜: NCP는 단일 ARPANET 내에서는 작동했지만, 여러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시나리오를 다룰 수 없었다. Kahn의 개방형 아키텍처 개념은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을 요구했다. 회선 수준의 네트워크 상호연결이 아니라 메타 수준의 “인터네트워킹 아키텍처.”
TCP의 복잡성: 초기 통합 TCP 프로토콜은 모든 애플리케이션에 신뢰성 메커니즘을 강제했다. 하지만 구현 과정에서 일부 애플리케이션(예: 실시간 음성/비디오)은 패킷 손실을 직접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는 TCP와 UDP로의 분리로 이어졌다.
네트워크 확장과 주소 관리: 1980년대 LAN, PC, 워크스테이션의 광범위한 채택은 인터넷을 변형시켰다. Paul Mockapetris가 발명한 DNS(Domain Name System)는 독립 네트워크들 간 계층적 호스트 명명을 관리했다. 32비트 주소 체계는 256개 네트워크면 충분할 것이라고 가정했지만, 성장은 그 예측을 빠르게 초과했다.
라우터 능력의 한계: 네트워크 규모 확장은 라우터 능력에 도전했다. 계층적 라우팅이 필요했다. Interior Gateway Protocols(IGP)는 지역 조정을, Exterior Gateway Protocols(EGP)는 지역 간 연결을 담당했다.
표준 프로세스의 공정성: 상업 부문의 성장은 표준 프로세스의 개방성과 공정성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벤더들이 IETF 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하면서(수백 명의 정부 자금 지원 학자들에서 1,000명 이상의 자비로 참석하는 벤더 직원들로), 모든 이해관계자—연구자, 사용자, 벤더—를 포함하는 협력적 TCP/IP 프로토콜 진화 그룹으로 변모했다.
💡 제시된 해결책
패킷 교환 구현: BBN이 1968년 12월 IMP RFQ에서 승리하여 실제 하드웨어를 구축했다. 1969년 9월 첫 설치 이후 12월까지 4개 노드가 연결되면서 패킷 교환이 이론에서 실체로 전환되었다.
TCP/IP 4대 원칙: Kahn과 Cerf의 설계는 네트워크 독립성, 최선노력 통신, 단순 게이트웨이, 전역 제어 부재를 핵심으로 했다. 바이트 스트림으로서의 통신, 슬라이딩 윈도우와 승인을 통한 흐름 제어, 32비트 주소 체계를 확립했다.
TCP/UDP 분리: 신뢰성이 필요한 애플리케이션은 TCP를, 패킷 손실을 직접 처리해야 하는 애플리케이션(실시간 음성/비디오)은 UDP를 사용하도록 프로토콜을 분리했다.
운영체제 통합: UC Berkeley가 TCP/IP를 Unix BSD에 통합한 것은 연구 커뮤니티 채택에 결정적이었다. “지원되는 운영 체제에 인터넷 프로토콜을 통합한 것은 인터넷이 광범위하게 성공적으로 채택되는 데 있어 핵심 요소 중 하나였다.”
DNS 발명: Paul Mockapetris의 DNS는 단일 테이블 접근법의 불편함을 해결했다. 계층적 명명 시스템은 독립 네트워크들이 협력할 수 있게 했다.
계층적 라우팅: IGP와 EGP의 조합은 지역 내부와 지역 간 라우팅을 분리하여 확장성을 확보했다.
RFC 시스템: S. Crocker가 시작한 비공식적이고 빠른 아이디어 공유 채널은 긍정적 피드백 루프를 만들었다. 제안이 추가 RFC를 촉발하고, 공식 명세 전에 합의를 구축했다. 이메일은 RFC 저자 패턴을 단일 위치 발표에서 협력적 다저자 기여로 변화시켰다.
벤더 워크숍과 Interop: Dan Lynch의 1985년 워크숍은 발명가와 벤더 간 직접 대화 채널을 열었다. 1988년 Interop는 50개 회사가 경쟁 제품들이 완벽하게 상호운용되도록 광범위하게 협력하는 장이 되었다. 이후 Interop는 전 세계 7개 위치에서 연간 개최되며 250,000명 이상의 참가자를 끌어모았다.
NSFNET의 AUP와 상용화: NSF는 NSFNET 백본 사용을 연구와 교육 목적으로 제한하는 “허용 가능한 사용 정책(Acceptable Use Policy)”을 시행했다. 이 의도적 제한은 PSI, UUNET, ANS CO+RE 같은 민간 경쟁 장거리 네트워크를 자극했다. 1988년 하버드 케네디 스쿨 회의들은 인터넷 상용화와 민영화를 검토했고, Kleinrock 의장(Kahn, Clark 위원)의 NRC 위원회는 1988년 “Towards a National Research Network”를 발표하여 상원의원 Al Gore에게 영향을 주고 정보 고속도로 개념의 기초를 확립했다.
🎯 당신에게 주는 조언
개방성과 협력의 힘: 1985년 벤더 워크숍에서 “벤더들은 발명가들이 그렇게 개방적인 것에 놀랐다”는 반응이 인상적이다. 경쟁자들이 함께 모여 제품들이 상호운용되도록 협력했다. 기술 표준은 폐쇄적 소유보다 개방적 협업으로 더 빠르게 발전한다.
단순성의 원칙: Kahn의 네 가지 원칙 중 “게이트웨이는 패킷 흐름 정보를 유지하지 않음, 단순성 보장”은 확장성의 핵심이었다. 복잡성을 최소화하고, 각 레이어가 자신의 역할만 수행하도록 설계하라.
점진적 전환 전략: 1983년 1월 1일 “Flag Day” 전환은 신중하게 조정되었고 “놀라울 정도로 순조롭게” 성공했다. 큰 변화는 가능하지만, 준비와 조정이 필요하다.
문서화의 중요성: RFC 시스템은 단순한 기술 문서가 아니라 커뮤니티의 집단 지성이 축적되는 장소였다. 비공식적이고 빠른 공유가 공식 표준보다 혁신에 중요하다.
표준 프로세스의 공정성: IETF가 정부 자금 지원 학자들에서 자비로 참석하는 벤더 직원들로 변화한 과정은 표준 커뮤니티의 건강한 진화를 보여준다. 모든 이해관계자—연구자, 사용자, 벤더—가 참여할 때 표준은 살아남는다.
인프라 투자의 타이밍: NSF의 1986년 결정—연방 자금 지원과 무관하게 일반 학술 연구를 지원해야 한다는 인식—은 결정적이었다. 인프라는 특정 응용 프로그램보다 먼저 구축되어야 한다.
🔨 실행 가능한 단계
다양한 구현으로 검증하라: DARPA는 스탠포드(Cerf), BBN(Tomlinson), UCL(Kirstein)에 TCP/IP 구현을 자금 지원했다. 약 1년 내에 세 개의 상호운용 가능한 구현이 프로토콜의 실행 가능성을 증명했다. 단일 구현은 취약하다. 최소 3개의 독립적 구현이 표준의 견고성을 보장한다.
운영체제에 통합하라: UC Berkeley의 TCP/IP를 Unix BSD에 통합한 결정은 “광범위하게 성공적으로 채택되는 데 있어 핵심 요소 중 하나였다.” 프로토콜이 아무리 훌륭해도 사용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으면 확산되지 않는다. 플랫폼 통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계층적 구조를 설계하라: DNS의 계층적 명명, IGP/EGP의 계층적 라우팅은 확장성의 핵심이었다. 단일 테이블이나 플랫 구조는 일정 규모 이상에서 붕괴한다. 처음부터 계층을 고려하라.
표준 프로세스에 모든 이해관계자를 포함하라: IETF의 변화—수백 명의 정부 자금 학자에서 1,000명 이상의 자비 참석 벤더로—는 건강한 표준 커뮤니티의 징표다. 연구자만, 또는 벤더만 참여하는 표준은 실패한다. 사용자도 포함하라.
워크숍과 무역 박람회를 조직하라: 1985년 벤더 워크숍은 발명가와 벤더 간 직접 대화를 열었고, 1988년 Interop는 실제 상호운용성을 증명했다. 기술 문서만으로는 부족하다. 직접 만나고, 시연하고, 협력하라.
점진적 전환을 조정하라: 1983년 “Flag Day”는 조정되었고 성공했다. SNMP와 CMIP의 병렬 개발(SNMP는 단기, CMIP는 장기)도 같은 맥락이다. 급진적 전환을 시도하되, 단계적 경로를 제공하라.
인프라에 투자하되, 민간 부문 전환을 준비하라: NSFNET은 8.5년간 6개 56 kbps 노드에서 21개 노드, 다중 45 Mbps 링크로 성장했다. 1995년 4월 백본 자금 지원 중단 시, 민간 부문이 인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공공 인프라는 민간 전환의 발판이어야 한다.
🌊 더 깊이 들어가기
바이트 스트림 vs 패킷: TCP/IP 설계는 “위치로 식별되는 연속 바이트 스트림으로서의 통신”을 확립했다. 이는 패킷 수준의 추상화가 아니라 스트림 수준의 추상화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애플리케이션 개발자는 패킷 경계를 신경 쓸 필요 없이 바이트 시퀀스로 생각할 수 있다. 슬라이딩 윈도우와 승인은 흐름 제어를 제공하면서도 네트워크 레이어의 복잡성을 숨긴다.
32비트 주소의 가정: 원래 설계는 “256개 네트워크면 충분할 것”이라고 가정했다. 1980년대 LAN, PC, 워크스테이션의 폭발적 성장은 이 가정을 빠르게 초과했다. 이는 IPv6로의 전환을 촉발했지만, 32비트에서 128비트로의 전환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설계 시 확장성을 과소평가하지 마라. 특히 주소 공간은 항상 예상보다 빠르게 소진된다.
게이트웨이의 단순성: Kahn의 원칙 중 “게이트웨이는 패킷 흐름 정보를 유지하지 않음”은 상태 없는(stateless) 설계의 철학이다. 게이트웨이가 상태를 유지하면, 장애 시 상태가 손실되고 복구가 복잡해진다. 상태를 엔드포인트에 두고 중간 노드는 단순하게 유지하는 “end-to-end” 원칙은 인터넷의 견고성과 확장성을 보장했다.
최선노력(Best-Effort) 통신: TCP/IP는 네트워크가 패킷을 “최선을 다해” 전달하되, 손실된 패킷은 소스에서 재전송한다고 가정한다. 이는 회선 교환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회선 교환은 경로를 예약하고 신뢰성을 보장하지만, 효율이 낮다. 최선노력은 효율을 최대화하되, 신뢰성은 상위 레이어(TCP)가 책임진다. 이 레이어 분리가 인터넷의 핵심 혁신이다.
RFC의 긍정적 피드백 루프: S. Crocker의 비공식적 RFC는 “제안이 추가 RFC를 촉발하고, 공식 명세 전에 합의를 구축”하는 메커니즘을 만들었다. 이는 폐쇄적 표준 위원회와 대조적이다. 개방적 피드백 루프는 빠른 반복과 광범위한 합의를 가능하게 한다. 문서는 단순히 결과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세스 자체를 가속화한다.
이메일이 협업 패턴을 바꾼 방법: 1972년 Ray Tomlinson의 이메일 개발 후, RFC 저자 패턴이 “단일 위치 발표에서 협력적 다저자 기여로” 변화했다. 특화된 이메일 메일링 리스트는 프로토콜 명세 개발에 필수가 되었다. IETF의 75개 이상 워킹 그룹은 각각 초안 문서 토론을 위한 메일링 리스트를 유지한다. 비동기 협업 도구는 표준 개발 속도를 10배 이상 가속화한다.
SNMP vs CMIP 사례: 네트워크 관리 프로토콜 논쟁은 실용주의의 승리를 보여준다. SNMP는 단순성을 위해 설계되었고, CMIP는 OSI 커뮤니티의 포괄적 접근이었다. 회의 결과는 SNMP를 단기 솔루션으로, CMIP를 장기 솔루션으로 병렬 개발하는 것이었다. SNMP는 거의 보편적으로 채택되었고, CMIP는 사라졌다. 단순성과 빠른 배포가 포괄성보다 승리한다.
연방 정책의 역할: 연방 기관들의 정책—공통 인프라 비용 공유, Federal Internet Exchanges, 1981년 CSNET 트래픽이 ARPANET 인프라를 공유하도록 허용, 지역 네트워크가 상업 고객을 찾도록 장려, “허용 가능한 사용 정책”—은 인터넷 성장을 형성했다. 특히 AUP의 “의도적 제한”은 민간 경쟁 네트워크를 자극했다. 공공 정책은 단순히 자금 지원이 아니라 생태계 설계다.
❓ 이 자료가 남긴 질문들
미래의 거버넌스 구조는?: 문서는 “인터넷이 비틀거린다면, 기술, 비전, 동기 부족 때문이 아니라 방향을 설정하고 집단적으로 미래로 행진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도메인 이름 제어와 차세대 IP 주소 지정을 둘러싼 논쟁은 적절한 사회 구조를 찾기 위한 투쟁을 드러낸다. 경제적·지적 투자를 가진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있을 때, 어떻게 합의를 구축하고 방향을 설정할 것인가? IETF 모델이 10억 사용자 시대에도 확장 가능한가?
상업화 이후의 혁신 속도는?: 1990년 ARPANET 해체와 1995년 NSFNET 백본 자금 지원 중단 이후, 혁신의 속도가 유지되었는가? 연구 커뮤니티 주도에서 상업 벤더 주도로 전환되면서, 장기 연구와 단기 제품 개발 사이의 균형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IPv6 전환이 20년 이상 걸리는 것은 상업화된 인프라의 경직성을 보여주는가?
개방성과 보안의 균형은?: 초기 인터넷은 신뢰할 수 있는 연구자들 사이의 협력을 가정했다. Kahn의 “게이트웨이는 상태를 유지하지 않음” 원칙은 확장성을 보장했지만, 보안은 후순위였다. 현재의 DDoS 공격, 봇넷, 랜섬웨어는 개방적 설계의 결과물이다. 개방성을 유지하면서 보안을 강화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상충하는가?
실시간 서비스의 미래는?: 문서는 “실시간 전송—오디오 및 비디오 스트림”과 “인터넷 전화 및 텔레비전”을 emerging capabilities로 언급한다. 1997년 시점에서 이는 미래였지만, 2025년 현재 우리는 이를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TCP/IP는 최선노력 패러다임에 기반한다. 실시간 서비스를 위한 보장된 QoS(Quality of Service)는 어떻게 제공되는가? UDP를 넘어서는 새로운 전송 프로토콜이 필요한가?
노매딕 컴퓨팅의 영향은?: 문서는 “노매딕 컴퓨팅—보편적 네트워킹과 휴대용 컴퓨팅(노트북, 페이저, PDA, 휴대폰)의 결합”을 언급한다. 1997년의 예측이 2025년 현재 어떻게 실현되었는가? 모바일 우선 인터넷, 5G, IoT는 원래 설계 가정(고정된 호스트, 안정적 주소)과 어떻게 충돌하는가? IPv6와 모바일 IP가 충분한가?
정보 서비스 레이어의 진화는?: 문서는 “상용화가 기본 네트워킹 제품과 연결 서비스를 넘어 진화했다”고 언급하며, 브라우저와 월드와이드웹이 “정교한 정보 서비스를 기본 인터넷 통신 위에 계층화”했다고 본다. 2025년 현재, 우리는 클라우드, AI, 메타버스를 봤다. 다음 레이어는 무엇인가? 정보 서비스의 끝은 어디인가?
경제적 인센티브와 공공재의 균형은?: 문서는 “산업은 미래 성장에 필요한 대규모 투자를 위한 경제적 근거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고 지적한다. 인터넷은 공공재이지만, 투자는 민간 부문에서 나온다. 넷 중립성, 인프라 투자, 콘텐츠 규제는 이 긴장의 표현이다. 공공재로서의 인터넷과 수익 창출 플랫폼으로서의 인터넷은 어떻게 공존하는가?
🔗 다른 지식과의 연결
End-to-End Principle: Saltzer, Reed, Clark의 1984년 논문 “End-to-End Arguments in System Design”은 Kahn의 “게이트웨이는 상태를 유지하지 않음” 원칙과 직접 연결된다. 기능을 네트워크 엔드포인트에 두고 중간 노드는 단순하게 유지하는 철학은 인터넷뿐 아니라 분산 시스템 설계의 핵심 원칙이다.
Conway’s Law: Melvin Conway의 “조직은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반영하는 시스템을 설계한다”는 관찰은 인터넷 설계에도 적용된다. ARPANET의 협력적, 개방적 연구 커뮤니티가 개방형 아키텍처 네트워킹을 낳았다. 폐쇄적 조직(예: AT&T, IBM)은 폐쇄적 네트워크(SNA, DECNet)를 만들었다.
The Cathedral and the Bazaar: Eric Raymond의 1997년 에세이는 같은 시기에 작성되었지만,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개발을 다룬다. RFC 시스템과 IETF 워킹 그룹은 “Bazaar” 모델의 초기 사례다. 비공식적, 분산적, 개방적 협업이 공식적, 중앙집중적, 폐쇄적 설계를 능가한다.
Platform Economics: 인터넷은 궁극적인 플랫폼이다. TCP/IP는 하위 레이어 표준을 제공하고, 상위 레이어(HTTP, SMTP, FTP)는 다양한 서비스를 가능하게 한다. 플랫폼 경제학의 네트워크 효과, 다면 시장, 보완재는 인터넷의 성장을 설명한다. Jean Tirole과 Andrei Hagiu의 플랫폼 연구는 인터넷 생태계를 분석하는 도구를 제공한다.
Diffusion of Innovations: Everett Rogers의 혁신 확산 이론(1962)은 인터넷 채택 곡선을 설명한다. 초기 채택자(연구자), 초기 다수(학계), 후기 다수(상업 부문), 후발자(일반 대중)의 순서는 ARPANET → NSFNET → 상용화 → 월드와이드웹 폭발로 이어진 인터넷 역사와 일치한다.
Standards Wars: Shapiro와 Varian의 “Information Rules”(1999)는 표준 전쟁과 네트워크 효과를 다룬다. TCP/IP vs OSI, SNMP vs CMIP, Ethernet vs Token Ring은 표준 전쟁의 사례다. 단순성, 빠른 배포, 개방성이 포괄성과 공식 표준을 이긴다.
The Innovator’s Dilemma: Clayton Christensen의 이론은 왜 AT&T, IBM, Xerox가 인터넷 시대에 뒤처졌는지 설명한다. 이들은 기존 고객(기업, 통신사)에 최적화되어 있었고, 인터넷은 초기에 “장난감”처럼 보였다. 하지만 파괴적 혁신은 저비용, 저품질에서 시작하여 결국 기존 시장을 대체한다.
Metcalfe’s Law: 네트워크의 가치는 사용자 수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밥 메트칼프의 법칙은 인터넷 성장의 자기강화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4개 노드(1969) → 50,000개 네트워크(1995)로 성장하면서,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The Mythical Man-Month: Fred Brooks의 소프트웨어 프로젝트 관리 원칙—”늦은 프로젝트에 사람을 더하면 더 늦어진다”—은 ARPANET 개발에도 적용된다. 소규모 핵심 팀(Kahn, Cerf, Roberts, Kleinrock)이 대규모 위원회보다 효과적이었다. 의사소통 비용이 병렬화 이득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 3줄 요약
1962년 Licklider의 “은하 네트워크” 비전에서 시작하여, Kleinrock의 패킷 교환 이론, Kahn과 Cerf의 TCP/IP 설계, 1983년 Flag Day 전환, 1985년 벤더 워크숍, 1988년 Interop 박람회, 1995년 NSFNET 민영화까지—인터넷은 정부·산업·학계의 협력으로 만들어진 개방형 아키텍처였다. 단순성(게이트웨이는 상태 없음), 최선노력 통신, 레이어 분리(TCP/UDP), 운영체제 통합(Unix BSD), 비공식 표준(RFC), 개방적 협업(IETF)이 성공의 열쇠였다. 1997년 시점에서 저자들이 남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터넷이 비틀거린다면, 기술 부족이 아니라 방향을 설정하고 집단적으로 미래로 행진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